최근 이지아 할아버지의 땅과 관련된 법적 분쟁이 화제를 모으고 있습니다. 이 땅은 친일파로 알려진 김순흥의 자손들 간에 소유권을 두고 벌어지는 갈등의 중심에 있습니다. 김순흥은 조선시대의 재력가로, 그의 후손들은 현재 이 땅을 둘러싸고 법적 공방을 이어가고 있죠.
이번 사건은 경기 안양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김순흥의 외손자가 막내 아들을 사문서 위조 및 변조 혐의로 고발하면서 시작된 이 사건은, 경찰의 불송치 결정과 함께 여러 가지 잡음이 일고 있습니다. 특히, 고발인 측은 경찰의 수사 과정에 문제를 제기하고 있으며, 검찰의 재수사 요구가 이어지고 있는 상황입니다.
법적 공방의 배경
- 김순흥의 땅은 시가 350억원 상당으로 평가됩니다.
- 2013년 군부대 이전 결정으로 인해 후손들에게 돌아가게 된 땅입니다.
- 가족 간 문서 위조 의혹이 제기되면서 법정 공방이 격화되고 있습니다.
가족 간의 갈등
이번 사건의 주요 인물인 외손자 A씨는 막내 아들 김씨를 고발하며, 사문서 위조에 가담한 정황을 포착했다고 주장합니다. 이 과정에서 가족 간의 신뢰가 무너지고, 갈등이 심화되고 있는 모습입니다.
결론
김순흥의 후손들이 겪고 있는 이번 사건은 단순한 법적 분쟁을 넘어, 가족 간의 신뢰와 관계를 시험하는 중요한 사례로 남을 것입니다. 앞으로 이 사건이 어떻게 전개될지 귀추가 주목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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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23
=
시사저널
183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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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자손간 분쟁으로번
진친일파 김순홍의
땅 “경찰 부실수사”
옷 이혜영 기자 (zero@sisajournal com)
승인 2024.11.1010.48
Log
안양 대규모 땅 개발 추진 과정에서 문서위조 논이미지 텍스트 확인
칸 속 법적 공방
막내 아들에 대한 가족의 고소 고발 경찰 잇달아
불송치 .. 검찰 요구로 재수사
고발인 “검수완박으로 범죄자만 살 판” . 경찰 “절
차엔 문제 없어”
친일파로 분류되는 고(골) 김순흥의 자손들이 시가 350억원 상당의
토지 소유권 및 개발을 둘러싸고 법적 공방울 벌이고 있는 것으로 확
인돼다 사진은 해당 필지 일대의 모습 C 네이버 지도 캠처
구한말 시절 손꼽히는 재력가이자 친일파로
분류되는 고(#) 감순흥이 남긴 350억원 상
당의 대규모 토지가 자손 간 법적 분쟁으로
비화있다. 2013년 군부대 이전 결정으로 김
순흥의 후슨들에게 되돌아가게 된 땅은 그
러나 수 년간 법정 공방의 마침표름 찍지 못
한 상태다 이 과정에서 가족 간 사문서 위조
의욕이 제기원 가운데 경찰의 석연지 않은
불승치 결정과 수사틀 둘러산 잡음도 불거
지고 있다:
10일 시사저널 취재틀 종합하면 경기 안양
만안경찰서논 김순공의 외손자 A씨가 김순
흥의 막내 아들인 김아무개씨틀 사문서위조
및 사문서변조로 고발한 사건을 재수사 중
이다:
조카에 고발 당한 김순용의 막내 아들 왜?
A씨가 김씨름 경찰에 고발한 것은 2023년
71월 말이다: 당시 A씨는 외삼촌뿐 아니라
사문서위 변조에 가담한 정황이 포착되 허
아무개씨도 함께 고발있다. 부동산 업계에
서 잔뼈가 국은 허씨는 해당 토지의 개발 관
련 자금 조달과 업체 중개에 관여햇던 핵심
인물이다.
문제의 출발점이 된 땅은 안양시 만안구 석
수동 일대 임야다 당초 이 곳은 육군 수도군
단 제5T 보병사단 예하 제767보병여단(별칭
철마부대)이 자리하고 있있다 2013년 국방
부는 군부대v 안산으로 이전하면서 징발재
산정리에 관한 특별법에 의거해 토지 원소
유자엿던 김순용의 법적 상속인인 자녀들에
게 우선 환매권올 부여있다.
그 유명한 친일파 김순흥 (일본정부가 주는 감수포장도 받음.)
이지아 본명이 김지아
https://www.sisajournal.com/news/articleView.html?idxno=314226#google_vignette
김순흥 나무위키 내용.
1933년
8월 조선나예방협회 기금으로 1,000원을 냈다.
[4]
1934년 6월 29일
조선중앙일보
감사역을 맡았다.
1936년
2월부터는 합자회사 구정상회 사장으로 있었다. 이때 교하간이교(校河簡易校)를 지을 땅을 1,500평을 기부하였다.
7월부터 금융신탁회사인 우익상사 취체역으로 있었다.
1937년
7월 22일
국방헌금 1만원(현재 가치 10억원 정도)을
종로경찰서
에 헌납했다.
그는 “나라에 대한 봉사의 뜻을 표하고자 적은 돈이나마 바치오니 받아주십시오”라고 말하고 돌아갔다.
조선군사후원연맹 사업비로 2,500원을 냈으며, 같은 해 9월 5일 결성된
‘경기도내 군기헌납기성회’의 발기인으로 참여하여 비행기 대금 500원을 냈다.
[5]
반일운동에 대항하기 위해(…) ‘일선융화’를 내걸고 결성된 동민회의 회원으로 활동했다
1939년
11월
조선총독부
1939년 9월 주식회사
쇼와
직물을 설립하여 사장을 역임.
1940년
9월 중앙연료주식회사 취체역을 맡았다.1943년 8월
징병제 실시에 감격하여(…)
[6]
국방헌금 3,000원을 헌납했다.
1944년
4월
일본 정부
가 주는 감수포장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