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 장군은 1597년, 인생의 많은 시련을 겪은 해였습니다. 이 해의 시작은 그가 왕명으로 삼도수군통제사직에서 해임되어 한양으로 압송되는 것으로 시작되었습니다.
2월 26일, 이순신은 왕의 명령을 거부한 죄로 체포되어 한양으로 향하게 되었고, 4월 1일에는 백의중군으로 복귀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가 이 소식을 듣고 오시던 중 향년 83세로 세상을 떠나셨고, 장례도 제대로 치르지 못한 채 다시 임지로 출발해야 했습니다.
4월 27일, 순천에 도착한 이순신은 도원수 권율의 조문을 받았고, 5월 4일 어머니의 생신날에는 슬픔에 빠져 하루 종일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어진 7월에는 칠천량 해전에서 조선 수군이 크게 패배했고, 그 소식을 듣고 이순신은 깊은 자책감에 사로잡혔습니다.
이후 8월 3일, 조정에서 다시 삼도수군통제사직으로 복귀하게 되었고, 9월에는 명량 대첩에서 대승을 거두며 조선 수군을 재건했습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도 10월 14일, 그의 셋째 아들이 전사하는 비극을 겪었습니다.
마지막으로 12월 30일, 이순신은 “비통할 따름이다”라는 말로 그의 유년 난중일기를 마무리했습니다.
이순신 장군의 1597년은 파직과 압송, 어머니의 상실, 칠천량 해전의 패배, 그리고 명량 해전의 대승까지 다양한 사건으로 가득 찼습니다. 이 모든 사건들은 그의 인생에서 한 해에 집약된 아픔과 영광의 연대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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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7년 2월 26일
왕명올 거부있다는 죄로 삼도
수군용제사직올 식탁당한
한양으로 압송
4월 1일 : 출목 후 백의중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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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3일
한양으로 압송된 자신올
보기
위해 어머니
께서
타고 올라오시다가 향년 83세로 사망.
4월 19일 :
관원들의 재속으로 장례도 못 치루고 다시 임지로 출발. 이때
부터 어머니의 임종음 지키지 못햇다는 자책감으로 인하여 난
중입기에는 ‘비동 ‘동곡’이라는 표현이 자주 등장하게 팀
4월 27일 ; 순천데 도착하자 도왼수 권율이 취하 군관올
보내어 조문합
5월 4일
돌아가신 모친 생신 날이라 일어나자마자 하염
없이 용곡합 하늘도 슬퍼스는지 오후예는 비가 하무종일 내
5월 6일
꿈에서 돌아가신
형님(회신 요신)이 나타나
이순신올 안타깝게 바라보미 하영없이 통곡합
7월 15일
칠천량 해전으로 인하여 조선 수군 귀열
7월 18일 : 칠천량 해전 대매소식움 전해들고 하염없이
동곡하다가 도원수 권율예계 본인이 직접 연안으로 가서 확인
하켓다고 건의 도왼수 권율은 흔쾌히 허락.
8월 3일
조정예서 선전관이 와서 이순신올 다시 삼도수
근통제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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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교사하다
8월 21일
하루종일 몹살올 알고 10번 토하다가 잠도
못자고 앉아서 밤생. 23임까지
상태로 지내고 배도 못담.
9월 2일
배설이 도망감.
9월 11일 : 출로
‘위에 앉아서 “세상에 나감은 사람이
어디
있젠는가” 신세들 한란하다 눈물올 흙림
9월 16일
명량 대접
9월 25일
26일 : 몸살과 오한을 앞음
10월 1일
본가 아산이 적의 공격올 받앗다는 소식올
듣고 아들 이회틀 보내 상황울 파악하도록 합.
‘와중예도
산으로 보랜 아뇨 걱정
10월 14일 : 21살 셋째 아들 이면의 전사 소식올 전해
돕음
10월 15일 : 잠율 못잠
10월 16일
부하들 앞예서 슬픔올 참다가 결국 노비
강막지의 소금창고로 가서 봉곡
10월 17일
항울 피우고 하안 미름 두르 후 통곡
10월 19일
꿈에서 고향집에서 보랜 노비가 나타나자
죽은 아들 생각에
다시 봉곡. 그날
코피블
~가까이
쏟음.
12월 30일
“”비통할 따름이다” 라는 말로 1597년
유년 난중일기는 끝남;
4출요약
파직-압송+백의종군+모친상 4연타 심치어 어머니
장례도 못 치루고 떠남
칠천량 해전으로 박살난 조선수군올 재건하고 명량해
전을 대승으로 이끔
셋째 아들 사망
모든 것이 전부 1년 만에 일어난 일
입명
~KS9
‘USya
ㄷ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