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정약용의 18년 유배, 권력의 음모와 갈등의 진실

조선의 위대한 실학자 정약용은 18년이라는 긴 유배 생활을 했습니다. 이는 단순한 정치적 음모 때문이 아니라 복잡한 인간관계와 권력 다툼이 얽힌 결과였습니다.

정약용과 김조순의 관계

사극에서는 안동김씨의 세도정치의 시작인 김조순이 정약용을 유배하게 만든 주범으로 묘사되곤 합니다. 하지만 실제로 김조순은 정약용과 동시대 인물로, 여러 차례 그를 풀어주려 시도했다고 합니다.

서용보와의 갈등

정약용의 유배가 18년이나 늘어난 주된 원인은 당시 좌의정인 서용보와의 갈등이었습니다. 서용보는 정약용을 암행어사 시절에 파면한 인물로, 두 사람은 철천지 원수가 되었습니다.

복수의 정치

서용보는 정약용에게서 뇌물 받는 사실이 드러나 질책을 당한 후, 그의 복수를 위해 유배를 연장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이는 고위 공직자의 질투와 복수가 얽힌 복잡한 정치적 상황을 보여줍니다.

결국의 귀양 풀림

정약용은 서용보가 은퇴한 후에야 귀양에서 풀려났습니다. 정순왕후는 그의 복권을 위해 노력했으나, 서용보를 중심으로 한 신하들의 반대에 부딪혔습니다. 결국, 정약용을 풀어준 것은 김조순이 아니라 서용보의 은퇴 이후의 일이었습니다.

정약용의 유배 생활은 단순한 개인의 불행이 아닌, 조선시대의 복잡한 정치적 관계와 인물들 간의 갈등이 얽힌 결과였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는 다른, 깊이 있는 통찰을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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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극에선 안동김씨 세도정치의 시작인 김조순이 안풀어줬다가

더 그럴듯해서 김조순을 음흉한 흑막으로 묘사하는게 더 많으나

실제 기록에따르면 대단히 다르고 평면적이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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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다만 정악용이 장기간 귀양울 가게 된 까닭은 당시 좌
의정인 서용보 탓이없다. 정악용이 암행어사 시절 연천 현
감인 서용보지 담관오리로 지목하여 파면하엿고 이후 정약
용과 서용보는 철천지 원수가 된다. 실제로 김조순과 정순
왕후는 정악용과의 사이가 나쁘지 않아 정악용의 귀양울
풀어주려고 노력하없으나 서용보가 극렬히 반대하엿고 정
악용은 서용보가 은퇴하고 난 이후에야 귀양지에서 풀려날
있없다: 믿기 어렵지만 정순왕후는 수렵청정올 할 때 주
도적으로 정악용의 복권올 추진하없으나 서용보지 주축으
로 한 신하의 반대로 결국 실패하엿고 막상 정악용올 귀양
에서 풀어준 사람도 김조순이없다. 서용보, 김조순, 정악용
모두 정조의 신임이 두터뒷던 신하들이다.

기록에서 사실 김조순은 정약용과 정조 치세 동세대인물이라 나름 친해서

여러차례 풀어주려 시도했었고

오히려 정약용의 유배가 18년이나 늘어진건

뇌물받아먹은걸 정약용한테서 들켜서 질책당한

높으신분의 찌질한 복수때문이었다고 한다.

18년 근본적인 원인 유배생활 정약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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