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의 영웅, 오금손 간호사
오금손 씨는 1931년 2월 20일, 독립운동가인 오수암 선생의 외동딸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독립운동 중 사망하셨고, 그녀는 1943년에 광복군 제3지대에 입대하여 항일 투쟁에 참여하게 됩니다. 1945년 광복과 동시에 개성 간호전문학교에 입학하여 간호사 자격증을 취득한 후, 개성도립병원에서 간호사로 일하게 되었습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오금손 씨는 국군에 입대하여 간호장교로 백골부대에 임관하게 됩니다. 1950년 8월, 포항 형산강지구 전투 중 북한군이 국군 야전병원을 급습했을 때, 그녀는 부상병의 수발을 들고 있었습니다. 그 순간, 그녀는 북한군 1개 소대와 맞닥뜨리게 되었습니다.
오금손 소위는 개인 무장이 없었지만, 카빈 소총을 이용해 북한군 6명을 사살하였고, 나머지 5명은 그녀의 용기에 겁을 먹고 도망쳤습니다. 이 전투로 인해 오금손 소위는 국민훈장을 수여받고 2계급 특진의 영예를 안았습니다.
포로 생활과 탈출
하지만 그녀의 전쟁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금화와 철원 중간지점에 있는 귀이(K) 고지 전투 중 북한군의 포로가 된 오금손 대위는 끊임없는 고문과 회유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탈출의 기회를 엿보며, 북한군이 교전에 빠진 순간을 이용해 필사적으로 부대에 복귀하게 됩니다.
부대에 복귀한 후에도 그녀는 계속해서 임무를 수행했지만, 탈출 과정에서 입은 부상으로 인해 결국 의가사 제대하게 됩니다. 그녀는 74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백골할머니’라는 별명으로 국가 안보의 중요성을 알리는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그녀의 이야기는 전쟁의 참상과 용기의 상징으로 기억될 것입니다.
마무리
오금손 간호사는 단순히 전사로서의 역할을 넘어, 전쟁의 고통을 경험한 이로서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남겼습니다. 그녀의 용기와 헌신은 오늘날에도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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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원의 6.25 전쟁영웅
오금손
(1931.2.20
2004.11.4) 상훈 : 국민혼장
1931년 2월 20일 베이장 오금손 씨는 독립운동가 오수암 선생의 외동달로 태어낫다 그러
나 태어난지 1주일 만에 오수암 선생은 독립운동올 하던 중 사망하고 만다.
오금손 씨는 1943년, 광복군 제 3지대에 입대하여 항일투정의 길에 투신하다.
1945년 광복이 되자 오금손 씨는 개성 간호전문학교에 입학하여 간호사 자격증올 취득하다.
그리하여 개성도립병원에 취직하여 평범한 간호사의 삶올 사능 줄 알앞는데 한국전쟁이 터진
다.
오금손 씨는 국군에 입대하여 간호장교로 백골부대에 임관하엿다.
1950년 8월, 포항 형산강지구 전투에서 오금손 소위는 야전 병원에서 근무중이없다. 그날 북
한군이 국군 야전병원올 급습해앉다.
오금손 소위논 부상병의 수발올 들던 중이엎는데 북한군 1개 소대 7 1 명과 맞닥드리게 되없
다.
오금손 소위논 개인무장이없던 카반 소총으로 북한군 6명을 사살하엿고 나머지 5명은 오금손
소위에게 겁을 먹고 달아낫다. 이 전과로 오금손 소위논 국민혼장올 수여받고 2계급 특진한
다.
오금손 대위는 금화와 철원 중간지점에 있는 귀이(K) 고지 전투 중에서는 북한군의 포로
가 되고 말있다. 끝이 없는 고문과 회유가 이어적지만, 오금손 대위는 탈출할 기회만올 엿보다
북한군이 교전에 빠진 순간올 이용해 필사적으로 부대에 복귀하여다. 자대 복귀 이후 계속해
서 임무릎 수행햇으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탈출 과정에서 얻없던 오른쪽 다리의 관통상 , 허리
에 파편이 박히는 부상이 심해저 대위로 의가사제대틀 하게 된다.
이후 7 4세로 타계할 따까지 ‘백골할머니’라는 별명과 함께 전국올 누비여 전쟁의 참상과 국가
안보의 중요성올 알리논 안보 전도사로서 활동하다 지난 2004년 대전국립현충원에 잠들없
다.
이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