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두황의 역사적 역할
이두황은 친일파로 알려져 있어. 명성황후 시해 사건에 가담한 인물 중 하나야. 그는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의 양아들로, 조선 역사에서 큰 논란을 일으킨 인물이기도 해.
그의 주요 행적을 살펴보면:
- 명성황후 시해에 가담
- 을미사변에 참여
- 동학농민운동을 무참히 진압
- 호남지역의 의병운동 탄압
이두황은 동학농민군을 잔인하게 학살한 대장이었어. 동학농민군이 나라를 구하려는 노력에 반해, 그는 그들을 무자비하게 공격했지.
그는 일기에서 동학농민군을 토벌하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기록했어. 청일전쟁 동안 일본군과 협력하여 동학군을 진압하고, 이후에도 무자비한 공격을 계속했지.
1895년에는 명성황후 시해 사건에 직접적으로 개입하여 길잡이 역할을 했고, 이후 일본으로 도망쳤어. 일본에서 그는 도박과 여색을 즐기며 살다가 다시 조선으로 돌아왔지.
그의 마지막 모습은 일본의 개로 살아간 것으로 알려져 있어. 현재 이두황의 묘소는 후손들과 공유되고 있다고 해.
이두황의 이야기는 단순한 역사적 사실을 넘어, 당시 조선의 복잡한 정치적 상황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야. 그의 행적을 통해 우리는 역사 속 친일파의 역할을 다시 한번 생각해볼 수 있어.
친일파 이두황의 묘(전주 한옥마을에서 1km)
명성황후 시해에는 일본 낭일들뿐만 아니라조선인들도 가담했는데
이두황이 그 중 한명
(이토 히로부미 7번째 양아들 이두황 )
1. 명성황후 시해2. 을미사변 가담
3. 동학농민운동 진압
4. 호남지역 의병운동 탄압
일본인들도 그의 행동을 비난했을 정도.
동학농민군 토벌대장 이두황나라를 위기에서 구하려는
동학농민군을 무참히 살해함
이두황이 쓴 일기(양호우선봉)1894년 음력 9월 10일
‘고종이 명하되 이두황을 장위영 영관에
임명하니 바로 내려가 동학농민군을 토벌하라’
– 이두황 일기-
청일전쟁 때 일본사령관을 찾아가일본군 앞잡이 노릇을 함
그 공적? 으로 동학농민군 토벌 대장이 됨
조선을 지배하려한 일본에게가장 위험한 세력이 동학농민군.
일본 총감 이토 히로부미는일본군 후비보병 19대대를 투입해
동학농민군 섬멸 작전을 펼치는데
이두황(이토 양아들)의 조선 부대가
일본군 지휘권 아래 있었다.
” 일본군 중위 사라키 세이타로와
소위 미야모토 다케타로가 내일 아침에
출발한다고 하니 그들을 맞이해 대접하고
힘을 합하여 기필코 큰 공을 세워…
– 이두황 일기 –
충청도 지역 동학군 진압1894년 음력 10월 14일
여관 앞에서(강동희, 이희영) 총포로 쏘아 죽이고
마을 집들은 모두 불을 질러 소굴을 태워버렸다
1894년 음력 10월 16일
수색하여 3명을 찾아 죽이고 그들이 생활하던
초막 400여 곳과 민가 200여 호를 전부 불살랐다
– 이두황 일기(충북 보은) –
천안 세성산(독립기념관 인근)1894년 음력 10월21일
패배해 달아나는 동학농민군을 추격.
수십 리를 뒤쫓으면서 더러는 쏘아 죽이고
포로로 잡아 완전한 승리를 거두었다
토끼사냥 하듯 한쪽으로 몰아동학농민군을 학살한 일본군
(3만 3천명 살해)
일본군이 돌아가자남아있던 동학군을 찾아 잔인하게 죽인 이두황
1894년 음역 12월 26일
5명을 쏘아 죽였다. 그 중 한 명은 목을 베어
사람들에게 공포심을 주고 머리를 나무상자에
넣어 장교에게 보내어 바쳤다
1894년 음력 12월 30일동학농민군 50여 명을 잡아 두목 3명은
목을 베었고 나머지는 쏘아 죽였으며
시신은 그대로 두었다
1895년 음력 10월 8일명성황후 시해 사건 당시 이두황은
길잡이 역할을 했다.
가담한게 알려지자 이두황과 아들 이진백은
부산항을 통해 일본으로 밀항.
일본에 가서는 도박과 여색을 탐함
이토 히로부미 총애를 얻어다시 조선에 돌아온 이두황
1909년 호남지역 의병을 대대적으로 토벌함
정미의병이 붕괴되자 일본은 바로
한일병합 조약을 체결함
이두황은 죽을때까지평생 일본의 개로 살아간다
현재 이두황의 묘소를 포함한 근처땅을공동 소유중인 후손들
(4만 282m² 임야)
지도에서 이두황을 검색해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