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악질 친일파 무덤의 최후
승병준, 그의 이름은 한국 역사에서 그리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지 않습니다. 일본 제국에 협력했던 그는, 해방 이후에도 후손들에게 자신의 유산을 남기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남긴 것은 무연고의 묘지와 악질의 기억뿐이었습니다.
2008년, 용인시 처인구에서 그의 묘지에 대한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승병준의 묘는 후손들이 나타나지 않아 무연고자로 분류되었습니다. 재산 상속을 위해 여러 번 분묘 개장 공고가 있었지만, 아무도 응답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그가 남긴 유산이 결국 잊혀질 운명임을 암시했습니다.
승병준의 악명
그의 가장 유명한 일화 중 하나는 헤이그 밀사 사건으로, 고종에게 일본에 대한 사죄를 강요하며 자결하라고 압박했던 것입니다. 그는 일본에서 백작의 지위까지 올랐지만, 그의 행동은 많은 이들에게 원망과 분노를 샀습니다.
후손의 외면
승병준의 후손들은 해방 이후 그의 재산을 되찾기 위해 여러 차례 소송을 벌였지만, 결국 그들의 묘는 이장되지 않고 방치되었습니다. 새 소유주는 여러 번 이장을 요구했지만, 후손들은 끝내 외면했습니다. 결국 승병준의 묘는 시에서 행정처분을 받아 파묘되었고, 그의 존재는 역사 속에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결론
이 사건은 친일파의 후예들이 어떻게 역사의 잔재로 남게 되는지를 보여줍니다. 승병준의 묘가 사라진 것은 단순히 무덤의 파묘가 아닌, 그가 남긴 악질의 유산이 후손들에게도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친일파의 역사는 단지 과거의 일이 아니라 현재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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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병준 모, 무연고로 토지주가 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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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8.08.26. 오후 3.71
수정2008.08.26. 오후 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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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일 용인시에 따르면 처인구 양지면 추계리 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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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 후손이 선산을 팔앗는데 거기 있던 승병준의
묘는 이장하지 안고 그대로 반스런
새 소유주가 이장해가라고 여러번 공고햇든데 끝까지
후손이 외면하는 바람에
무연고자 모 취급받아 시에서 행정처분으로 파요요
당하고 화장해 영원히 사라지고 말있다
참고로 공고 후 바로 파요하진 안분다.
10년가랑이나 시간을 주는데 한번도 응하지 않앗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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